내 인생의 사계절
-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조성순 할머니 이야기 -
1950년 5월 5일 그리고 3월 19일
손자야, 손녀야, 오늘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좀 해줄게. 내가 태어난 날은 1950년 5월 5일, 음력으로는 3월 19일이야. 왜 이 날짜를 기억하냐고? 출생 신고를 앞당기려고 음력 날짜로 신고 했거든. 그 시절에는 교육을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하려는 마음이 커서, 출생 신고를 일찍 하는 경향이 있었어. 그래서 나도 한 살 일찍 어린 나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단다.
할머니는 2남 4녀 중 세 번째 아이였어. 언니, 오빠가 있고, 나, 그리고 나보다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이 둘이 있었지. 특히 막내 여동생과는 9살 차이가 났는데, 그 아이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우리 가족에게 큰 슬픔을 안겼단다.
우리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어. 할아버지는 일본의 명문대인 메이지 대학을 나오셨고, 그 당시엔 좋은 직장이었던 금융업에 종사하셨지. 할머니는 경기여고를 나오신 분이셨어. 우리 가족은 대원군의 사위였던 증조 할아버지를 둔 풍양 조씨의 대단한 양반 집안이었단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왕실의 옥새를 가지고 있었던 집이기도 했어.
나는 6.25 전쟁이 나던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을 잘 모르는 세대에 속해. 내가 태어나고 6.25가 났던 1950년도에 우리 가족은 충청북도 내수에 살았단다. 아버지가 조합장으로 계시던 때였지. 그래도 6.25 때는 우리 가족이 크게 고생하지 않았어. 아버지만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고, 우리는 충북의 사택에서 지냈단다.
만리동 시절과 생애 첫 기억
그 후 서울 만리동으로 이사를 왔고, 그 시절 우리는 뚝섬에서 배를 타고 봉은사까지 놀러 가기도 하고, 송추 유원지에서 수영을 하며 놀기도 했어. 우리 엄마는 항상 나를 잘 먹이려고 애썼지만, 나는 별로 밥을 많이 먹지 않았어. 마르고 작았어도 의외로 나는 항상 건강했고, 엄마가 준비해주신 흑염소 같은 보양식 덕분에 기운이 넘쳤지.
이제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게 국민학교 1학년 입학식이 제일 생각이 나. 왜냐하면 내가 키가 작고 한 살 어리고 굉장히 몸도 약하고 밥도 안 먹어서 아주 조그마했어. 그래서 입학식 날 보니까 애들이 그냥 너무 이렇게 키가 있으니까 잘 안 보여가지고 발돋움을 하면서 선생님을 봤던 생각이 나.
봉래 국민학교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봉래 국민학교였어. 지금의 초등학교를 그 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어. 그 학교가 있는 곳은 만리동 산 위, 언덕 위에 있는 동네에 있었지. 그 때는 6.25 전쟁 때문에 아이들이 많지 않았어. 전쟁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어서, 우리 학년은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단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같이 다녔지. 입학할 때는 손수건을 앞에다 매달고 다녔어. 코를 닦을 수 있게 말이야.
학교를 등교할 때는 책 가방을 메고 다녔지. 학교가 언덕 위에 있어서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운동이 됐어. 우리 집은 학교 바로 밑에 있었는데, 일본 적산가옥 같은 큰 이층 집이었어. 그래서 우리 집과 학교는 아주 가까웠지.
선생님들은 나를 많이 이뻐하셨어. 하지만 나는 밥을 잘 안 먹는 아이였어. 아버지가 한두 숟갈 먹여줘서 겨우 살았단다. 학교에선 도시락을 가져갔지만, 밥을 잘 안 먹으니까 부모님이 선생님 옆에서 먹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어. 그래서 선생님 눈치를 보면서 겨우 몇 숟갈을 먹었지. 학교 화장실은 너무 무서웠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집까지 가서 화장실을 다녀왔어.
그 때 국민학교 때 나는 정말 똑똑했던 모양이야. 선생님들이 나를 보면서 눈이 반짝인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 공부도 정말 잘했지. 맨날 전교 1등 가까이 하면서 진짜로 학교에서 인정 받았어. 작고 몸도 약했지만, 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귀여워하셨어. 공부는 정말 잘했는데 운동은 못했어. 공을 던질 때마다 힘이 없어서 고생했지. 그 당시에는 체력 점수도 중요했는데 체력 시험 점수가 좀 낮았던 편이었어. 그래도 공부는 우수해서 경기여고나 이런 명문 학교에 갈 수 있는 실력은 충분했어.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성심여중에 보내고 싶어 하셨어. 그 학교는 굉장히 귀족적인 학교였거든. 그래서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성심여중에 가게 됐어.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내가 6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학교에 다닌 것으로 개근상도 받고 우등상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어. 정말로 큰 칭찬을 받았던 순간이었지.
국민학교 친구들과는 동창회를 자주 하지는 않았어. 지금은 그 시절 친구들과는 만나지는 않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어. 그리고 가끔은 예전 추억을 되새기며 서로의 소식을 궁금해하곤 해.
성심여중, 성심여고
손주들아, 중고등학교 이야기를 해줄게. 나는 성심여중, 성심여고라는 정말 특별한 학교에 다녔어. 거기선 중학교 1학년부터 영어로 수업을 했지. 나는 처음엔 영어를 잘 못했는데, 그 학교엔 대사관 아이들이나 외국에서 온 아이들이 많아서 친구들의 영어 실력이 정말 대단했단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어울리려고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며 노력했지. 학교에서는 영어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상점도 있어서, 영어를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살 수 없었어. 그런 환경 덕분에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지.
그 학교는 정말 친밀한 공동체였어. 한 학년에 60명밖에 되지 않아서, 중고등 6년 동안 함께하며 서로의 집안 사정까지 다 알게 되었지. 그 덕에 지금까지도 친구들과 자주 만나. 대부분은 한국에 있지만, 10명 이상은 외국인과 결혼해서 해외에 살고 있어. 그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에 나의 사회생활이 풍부해졌어. 그 학교는 정말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야.
막내 동생의 이른 죽음
손주야, 우리 가족 이야기 중에 마음이 아픈 부분도 있단다. 형제들 사이에는 다섯 살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았어. 내 위로는 언니와 오빠가 있었고, 나 다음으로는 세 살 어린 남동생과 그 다음 다섯 살 어린 여동생, 그리고 가장 어린 동생이 있었어. 하지만 막내 동생은 아주 어린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지. 그 소식은 우리 가족에게 정말 큰 슬픔이었어.
그 아이는 정말 귀엽고 예뻤어서 내가 친구네 집에 가면 항상 함께 데려가곤 했단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린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 복수가 차서 맹장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궁암 이었던거야. 우리 엄마는 그 아이를 위해 정말 많이 애썼고, 고생도 많이 했어. 그런데 그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엄마도 나중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단다. 엄마는 우리들의 결혼을 모두 보시고 돌아가시긴 하셨지만, 58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가셔서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큰 슬픔으로 남아있어.
어린 시절 이야기
손주들에게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우리 집은 형제가 많았고, 각자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우리 사이는 항상 돈독했어. 특히 나는 운동을 그다지 잘하지 못해서 형제들과 뛰어놀 때 자주 끼지 못했지. 대신 나는 친구들과 다른 종류의 놀이를 즐겼어. 우리 오빠와 언니는 서로 자주 다퉜는데 나는 그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단다.
어렸을 때 병에 걸렸어도 크게 아파본 적은 없어. 우리 엄마가 항상 정성껏 돌봐주셨거든. 특히 우리 남동생과 여동생은 폐결핵에 걸렸었는데, 그 때 엄마가 얼마나 애썼는지. 그 당시에는 폐결핵이 정말 무서운 병이었어. 그런데도 엄마 덕분에 그들도 완치될 수 있었지. 엄마는 늘 우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셨어.
나는 언제나 약하고 조용한 아이였어. 가끔은 우리 어머니를 따라 나서면 길에서 혼자 졸기도 했지. 그런데 나의 성격이 적극적으로 바뀐 건 남편 덕분이야. 남편도 나처럼 소극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더 적극적으로 변해야겠다고 결심했어.
흑백 TV와 지프차
손주들아, 우리 집안 이야기를 조금 더 해줄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어. 그것도 커다란 일본제 흑백 TV였지. 그 당시엔 드문 일이라 사람들이 우리 집에 TV 구경 오곤 했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집에서 TV를 보는 걸 좋아했어. 대부분 뉴스나 스포츠 경기 같은 걸 봤지. 그 땐 만화나 드라마 같은 오락 프로그램은 그다지 많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 집엔 차도 있었어. 그때 당시엔 자가용이라고 부르는 승용차는 많지 않았지만, 우리 집엔 지프차 같은 것이 있었단다. 나중에는 기사 분도 계시고, 집안 일을 도와주는 분들도 있었어. 우리 집은 항상 북적거리는 큰 가정이었지.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정말 다채로운 추억이 많아. 이런 이야기들이 너희에게 우리 가족의 과거가 어땠는지 조금이나마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가정의 전통과 믿음
우리 가정은 3대가 함께 살았어. 내 아버지의 첫째 형이 큰 집의 양자로 가셨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게 되었지. 그래서 비록 차남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장남의 역할을 하셨어. 그 시절엔 큰 집에 아들이 없으면 작은 집에서 큰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문화가 있었단다. 신기하지?
우리 집은 전통적인 양반 집이라 제사 같은 유교식 행사를 매우 중요시했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3년 동안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고, 아침 저녁으로 상을 차려 드렸지. 우리 어머니는 매일같이 이런 의식을 따랐고, 우리 가족은 이런 전통을 엄격하게 지켰어. 이야기를 들으며 너희도 우리 가족의 깊은 역사와 전통을 이해할 수 있길 바라. 우리의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해. 이런 전통들이 우리 가족을 오늘 날까지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 란다.
손주야, 내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교회 같은 곳은 상상도 못 했어.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을 때부터 친구 분들이 어머니를 교회로 데려가기 시작했지. 그렇게 해서 우리 가정에도 믿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어. 나는 천주교 학교를 다녔지만, 그 때는 그렇게 믿음이 깊지 않았어. 그래도 환란이 우리 가족에게 많이 찾아오면서, 조금씩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지.
우리 가족은 본래 불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절에 가본 적은 있어. 우리 어머니를 절에 모시는 의식을 했었거든. 그리고 우리 집안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었어. 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어. 내가 역사를 배우면서 대원군의 쇄국 정치와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피가 우리 가문에도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 같은 것도 느꼈지.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 가족이 겪는 아픔과 시련이 그런 과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하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 가면서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지. 그래도 진정으로 믿기 시작한 건 그 이후의 일이야.
기독교 신앙과 천국의 꿈
할머니가 정말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건 할아버지가 아프셨을 때야. 살던 아파트에서 우연히 만난 한 분이 우리를 소망 교회로 초대하셨고, 그 곳에서 받은 위로와 힘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단다. 우리 부부는 거기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프실 때마다 교회에서 많은 위로와 기도를 받았어. 할아버지가 입원하셨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심방오셔서 기도도 해주시고 정말 감사했어. 그리고 입원했던 병실 문에 붙어 있던 성경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장 4절 말씀이었는데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어. 남편 수술중에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살리신다는 믿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던 생각이 나.
할머니는 신앙과 관련한 특별한 꿈 두 개를 꾼 적이 있어. 하나는 예수님이 반쪽만 보이시는 꿈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는 꿈이었어. 힘들게 걸어 올라 천국에 가보니 막상 천국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아래를 보니 거기에만 사람들이 잔뜩 있어서 놀랐던 꿈이야. 그 꿈들은 할머니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 특히, 편안하게만 살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단다.
지금도 할머니는 매 주 교회에 다니면서 다른 이들을 돕고 있어. 큰 일은 아니지만, 운전을 할 수 있으니까 몸이 불편하신 목자님을 모시고 다니거나, 성도님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하는 것 같은 일이야. 내 작은 봉사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게 바로 할머니가 믿음을 통해 배운 것이란다.
어머니의 민어찌개, 갈비찜
손주야, 우리 집 얘기를 해줄게. 우리 집은 만리동 꼭대기에 있었어. 양재 고등학교와 봉래 국민학교 근처였지. 밤에는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곳이었단다. 집도 굉장히 컸고, 양옥집에 별채도 있어서 친구들이 놀러 오는 걸 참 좋아했어. 우리 엄마는 친구들이 오면 꼭 맛있는 밥을 차려주셨지. 특히 우리 남동생 친구들 20명이 오면 그 아이들 밥도 다 차려주셨어.
우리 어머니는 요리를 참 잘하셨어. 기억나는 음식이 민어찌개, 갈비찜, 빈대떡, 만둣국. 너무 맛있었지. 그 외에도 다양한 반찬을 빠짐없이 준비하셨지. 엄마는 정말 통이 크시고 사람 좋아하는 분이셨어. 엄마의 요리 솜씨와 그 넓은 집에서의 추억은 정말 잊을 수 없단다.
손주야, 그 때는 지금처럼 라면이 흔하지 않았어. 주로 잔치국수를 먹었지. 하지만 외식은 종종 했단다. 네 할아버지가 지점장이셨을 때는 우리를 데리고 외식을 자주 하셨어. 탕수육이나 짜장면 같은 중국집 음식도 먹고, 양식당에서의 식사도 즐겼지. '호수그릴' 이라는 유명한 식당에서 양식을 먹기도 했어. 그 시절에도 가족과 함께하는 외식은 참 좋았어.
너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좋은 것만 주려고 많이 노력하셨단다. 나는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많이 일하거나 헌신적이지는 못했어. 엄마를 완전히 닮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사랑과 노력은 언제나 기억해.
장래희망
손주야, 어릴 적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그들이 참 좋아 보였거든. 하지만 점차 커가면서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더 자라서는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지. 그 때 당시엔 지금처럼 다양한 직업이 많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나의 부모님 이야기
손주들아, 할머니의 부모님 이야기를 들려줄게. 우리 어머니는 마음이 따뜻하셔서 항상 보호가 필요한 가족들을 돌보는 분이셨어. 어머니는 특히 오빠를 많이 이뻐하셨어. 오빠가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가 엄하게 대하시면 어머니가 그늘이 되어 오빠를 보호해 주셨지. 남동생도 고시 준비를 하느라 많은 기도와 지지를 받았어. 우리 가족은 모두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 몸이 약해서 아버지가 직접 밥을 떠먹여 주시며 키우셨으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조금 다르셨어. 내가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어머니는 왜 나를 그렇게까지 이뻐하지 않으셨는지 그런 고민을 종종 했었어. 그래서 사춘기 때에는 엄마에게 반항도 하고 서로 부딪히기도 했던 기억이 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가족 모두를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어려움을 겪는 가족 구성원에게 더 많은 사랑과 보호를 주셨던 것 같아.
우리 집은 엄한 편은 아니었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계셔서, 우리를 차별없이 평등하게 그리고 굉장히 현대적으로 키워 주셨지.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을 꽤나 행복하게 보냈어. 회초리? 그건 우리 집에서는 별로 없던 일이었지. 아마 오빠에게는 가끔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딸들에게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어. 아버지는 특히 여자에게는 더욱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셨거든.
우리 가족은 남자, 여자 따로 식사하고 그런 차별 같은 거는 없었어. 아버지는 오히려 딸들을 더 챙기려고 했지. 특히 나처럼 마르고 약한 아이한테는 한 술이라도 더 먹이려고 했어. 튼튼한 아이들보다는 좀 더 챙겼던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모두 같은 상에서 밥을 먹었어. 우리 집은 한옥이 아니라 양옥식 이층집이었고, 식탁이 있었거든. 식사 때는 아들이든 딸이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구분 없이 모두 같이 먹었어. 가끔 시간이 안 맞을 때만 따로 먹기도 했지.
이화여자대학교 가정대학
아이들아, 내가 어릴 적에는 이화여자대학교라는 곳이 아주 명문대학이었단다. 가정대학과 약학대학이 유명했고, 할머니는 가정대에 갔었지. 우리 과는 특별히 노란색 뱃지를 달았는데, 그게 우리 학교의 전통이었어. 처음에 이화여대는 가정대학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특히 더 자부심이 있었어. 나를 포함해서 우리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도 몇 명이 같이 이화여대에 들어갔었지. 그 때는 할머니가 다녔던 성심 고등학교에서 이화여대를 간 학생들이 꽤 많았어.
대학교 시험은 학교에서 필기시험으로 보았는데, 수학과 외국어도 시험을 봤었단다. 이화여대에 가기로 마음먹고 거기에서 시험을 치른 거야. 우리가 지원할 때는 경쟁이 아주 치열했어. 좋은 고등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으니까. 그 때 내가 속한 과는 정말 좋은 친구들과 함께 시작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고 생각해.
그 시절 친구들 중에는 집안이 부유한 친구들도 많았어. 대통령 주치의 딸이나 재무부 장관의 딸 같은 친구들이. 친구들과 정말 끈끈한 우정을 나눴지. 그 친구들 덕분에 종종 자가용도 얻어 타고 다녔단다. 그 때의 추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생생해.
미팅의 추억
대학 시절에는 미팅을 자주 했던 추억이 떠오르네. 특히 우리 이화여대 가정대학은 미팅 요청이 정말 많았어. 서울대학교에서도 자주 왔었지. 그때는 말야, 무려 50번도 넘게 미팅을 했어. 옆에 있던 연세대학교 애들과는 거의 만날 일이 없었어. 대부분의 미팅이 서울대에서 들어왔거든.
그 때 우리는 양장점과 옷가게, 그리고 카페가 많았던 곳에서 자주 만났어. 술집보다는 그런 곳이 많았지. 우리는 숙제도 카페에서 하고 음악 들으면서 공부도 했었어. 그 시절엔 술은 그렇게 많이 안 마셨어. 생맥주가 유행이었고, 명동에 가면 오비스캐빈 같은 곳에서 생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지.
그리고 말야, 우리 과는 서울대학교 공대와 미팅을 자주 했어. 자유센터나 신라호텔 옆 같은 유명한 곳에서 만났고, 길에서 쪽지로 미팅을 주선하기도 했어. 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 딸기밭으로 미팅 가기도 했고,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단다.
짧지만 즐거웠던 직장 생활
우리 세대에는 학점을 그렇게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었어. 대부분의 여자 친구들은 취업보다는 예쁘게 꾸미고 잘 지내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지. 물론 취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많지 않았단다. 나중에는 내 친구 중 몇 명이 큰 회사에 갔고, 나도 외환은행에 취업할 수 있었어. 대학생들만 대상으로 한 취업 시험에서 영타와 논문 같은 것을 써서 통과했지. 그 곳에서는 수출입 관련 업무를 맡았는데, 업무량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참 좋았어.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바로 일을 시작했단다. 월급을 꽤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해. 옷도 사고 용돈도 쓰고, 너희 할아버지가 군대 갔을 때는 데이트 비용까지 내가 냈어. 직장인 외환은행이 참 좋았어. 한국 외환은행은 그때 왕성하게 돌아가고 수출도 잘 됐던 특수은행이었거든. 결혼을 하면서 관두긴 했지만, 그 전까지 꽤 재미있게 일했던 것 같아. 본점에서도 있었고, 신용조사부 쪽으로도 옮겨서도 있었어.
처음엔 일이 너무 많아서 보람되었지만 힘들었고, 신용조사부로 옮긴 이후에는 반대로 일이 너무 한가하고 시간이 안가서 힘들기도 했단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아. 그래도 많이 배우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회식도 많이 하고 좋은 데서 밥도 많이 먹었지. 그 때는 좋은 부서에서 일하니까 돈이 많아서 그랬나 봐. 그리고 그 때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지금도 가끔 연락하면서 그 시절을 추억해. 그 모든 경험이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단다.
아이들아, 예전에는 여자들이 결혼하면 일을 그만두는 게 보편적이었어. 은행도 그랬지. 직장규정이 여자들은 일단 결혼하면 나가게 돼 있었어. ​​​​그래서 그때는 여자들이 약간 꽃 같았어. 은행에서도 여자들을 회사의 꽃으로 여겼고, 남자직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조적인 업무를 맡고 외모나 옷에 신경을 써야했지.
요즘은 맞벌이도 많고 여자들도 경제활동을 하니까 지금 같으면 은행 다녀도 계속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요즘 시대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지. 아파트 대출이 있고, 학원비도 비싸고, 남자 혼자 벌어 모든 걸 해내기 힘들어 졌으니까 여자도 안정적인 직장이 중요하겠지.
예전에는 은행 다녔지만, 지금 같으면 변호사나 대학 교수 같은 일을 해보고 싶어. 젊은 여성들도 이제는 전문직을 향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그래서 이제는 여자들도 더 잘할 수 있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아. 만약에 요즘에 태어났다면, 나는 그런 분야로 진로를 선택했을 거 같아.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는데 말이야.
첫 해외여행 에피소드
첫 해외여행 생각이 나네. 결혼하고 나서야 미국으로 갈 수 있었어. 그 때가 한 30대 였지. 그때 비자를 받으러 미국 대사관에 갔을 때 집에 방이 몇 개냐고 물었던 거 기억나. 남편의 직업과 월급도 꼭 물어 봤었지.
언니가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어서 기회가 생겼어. 그래서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갔어. 그 당시엔 미국으로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남편이 미국출장 중이라 시카고에서 만나기로 하고, 난 혼자 LA로 출발했어. 그 때는 시카고 직항이 없어서 LA에서 갈아타야 했거든. 공항에서는 참 많이 헤맸지. LA에서 내려서 언니한테 전화하려는데 잔돈이 없어서 100불짜리를 겨우 동전으로 바꾸고 전화를 걸었어. 국내선으로 가서 갈아타야 한다는데, 국제선이랑은 떨어져 있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 그래서 외국인한테 짧은 영어 실력으로 겨우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 분이 친절하게 도와주셔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시카고에 무사히 도착했어.
언니는 공항을 자주 가서 알텐데 나에게 미리 이런 얘기를 안 해줘서 정말 당황스러웠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우왕좌왕 하던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참 재미있는 에피소드야.
나들이 추억
손자들아, 내가 젊었을 때나 대학 다니거나 직장 다닐 때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어. 하지만 우리 가족은 가까운 곳에 자주 놀러 갔지. 아버지가 그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지프차 같은 자가용을 가지고 계셔서, 가족들하고 놀러 다니는 게 가능했단다.
대학교 때는 친구들과 함께 해수욕장에 많이 갔어. 네가 알고 있는 해운대 같은 유명한 곳 말고,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는 서쪽 해수욕장들이지. 만리포나 대천해수욕장 같은 곳도 있었고,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곳도 많았단다. 그 때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많이 했었어. 그리고 말이야, 우리가 첫 차를 산 건 한국에서 처음 나온 국산차인 포니원이었어. 그 차로 너희 할아버지가 면허 딴 직후에 운전해서 무연이, 무석이, 조카 소현이를 데리고 수원민속촌까지 드라이브를 갔던 기억이 나. 그 차로 우리 가족의 많은 추억이 시작되었단다. 그 시절엔 차가 그리 흔하지 않았지만, 포니원 이 후에도 우리 집에는 차가 두 대나 있었어. 할아버지도 차를 운전하셨고, 나도 많이 운전했지. 그 차로 많은 여행을 했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운전을 했단다.
영향을 끼친 책과 인물
손자야, 어떤 인물이 내 삶에 크게 영향을 줬냐고?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들을 좋아했지만,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그런 감정이 변하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나는 소설이나 만화책을 많이 읽었던 터라, 그 속의 이야기들과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 특히 '소공녀', '작은 아씨들' 같은 순정 소설들을 좋아했지. 그 속의 순수하고 순정적인 이야기들이 나의 감성을 많이 키워줬단다.
정치인 중에는? 아, 그때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 기억에 남아. 특히 박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내 학교 후배였어. 그녀는 항상 전차를 타고 다니곤 했지. 많은 이들이 그녀를 기사 있는 차로만 다닐 거라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전차를 이용했단다. 생각해보면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딸을 검소하고 바르게 잘 키웠던 거 같아. 박근혜는 항상 선배들에게 인사를 잘하고 매우 검소한 모습으로 학교 생활을 했지. 그런 점들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어.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내가 잘 아는 정치인 같아. 그 당시 내 친구 중에는 재무부 장관 딸도 있었고, 박 대통령의 주치의 딸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시절, 군인이라는 직업이 아주 대단한 것으로 여겨졌어. 내 동창 중에는 공군 사령관의 딸도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군인들이 모든 걸 척척 알아서 해주는 걸 보고 군인들이 멋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말이야, 손자야, 그 시절 나의 삶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고, 그들 각자가 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단다.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내가 19살 때였어.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여름 캠프에 갔었지. 대천 해수욕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지냈었는데, 너희 할아버지도 그 곳에 있었단다. 우연히 내가 눈에 띄었나 봐. 너희 할아버지가 나중에 신문사에 내 연락처를 물어서 나에게 연락을 했지 뭐야.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지.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지. 하지만 그 때는 다른 남자친구가 있어서, 바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어.
그렇지만 너희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에게 관심을 보였단다. 해마다 연락하고, 내 생일에는 꽃도 보내주고... 그렇게 대학 3학년 때 다시 만났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거야. 그 당시에는 핸드폰 같은 게 없어서 연락은 모두 집 전화로 했어. 우리 집은 꽤나 개방적이었지. 남자 친구가 있으면 집에도 데려와도 되는 분위기였어. 크리스마스 때나 특별한 날에는 남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했고, 엄마는 항상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지.
너희 할아버지는 할머니 집에서도 아주 좋게 평가 받았어.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고, 사람 자체도 매우 반듯했지. 그래서 군대에 잘 다녀오라는 응원과 함께, 부모님께서는 "우리 딸은 우리가 잘 지킬 테니 걱정 말고 가라"고 말씀하셨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기다리며, 그 사이에 더욱 더 깊은 사랑으로 발전해 갔단다. 그렇게 우리는 한 걸음씩 서로에게 다가갔어.
너희 할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는 면회도 쉽지 않았지만, 어느 날 너희 증조 할아버지가 나를 차에 태우고 면회를 가자고 했어. 그 때 증조 할아버지는 경성방직이라는 곳에서 일하셨는데, 그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방직 회사 중 하나야. 그렇게 나를 자신의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너무나도 애써주셨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졸업식 때도 나를 초대해 함께 사진도 찍고 밥도 사주셨어. 그런 모든 일들이 우리 양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지. 너희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 하셨고, 모두가 서로를 받아들이며 우리 사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어.
약혼식과 결혼식, 신혼여행
내 생일 이었던 5월 5일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약혼식을 가졌어. 너희 할아버지가 군대에서 제대하기 전 이었지.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단다.
시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가 정원을 보시고는 약혼식을 여기서 가든 파티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셔서 약혼식은 우리 집 정원에서 하게 되었어. 약혼식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날이었어. 내 생일이기도 했고, 모든 게 그냥 완벽했어. 중국 출장 요리사를 부르고 정원을 화려하게 장식했고, 친구들, 친척들 모두 초대했어. 정말 영화에서 나올 법한 파티였어. 드레스도 입고, 한복도 입고, 정말 화려하게 준비했지. 그런데 그 날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어서 안으로 들어가 파티를 이어갔어. 음식도 풍성하게 차려지고 모두가 정말 즐거워했어.
결혼식은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했어. 그때 당시에는 정말 최고의 장소였지. 그리고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어. 그때는 해외여행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지. 제주도가 그야말로 최고의 신혼여행지였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지. 비록 그 전에 강릉갔을 때였나 한 번 타 본 적은 있었지만, 제주도로 가는 비행은 또 다른 감동이었어.
제주도 신혼여행
결혼 후 첫 집과 이사 이야기
결혼하고 나서 우리 첫 집은 연희동에 있었어. 시댁에서 새로 지은 이층집이었지. 연희동은 그 때도 좋은 동네였어. 우리 친정 집도 연희동이었는데 그 옆에 빈 땅이 있어서 시댁에서 하얀 이층집을 새로 지었단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1년 동안 거기 살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그 다음 분가하자고 말씀 하셨어. 무연이가 태어나고 나서, 우리는 2층에 살았어. 그런데, 아이가 울면 정말 힘들었어. 아랫층과 위층을 왔다 갔다 하며 아이를 돌보는 게 쉽지 않았어. 그리고 한 겨울에 2층은 난방이 잘 안되고 추워서 힘들기도 했지. 시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지만, 육아는 여전히 힘들었어.
2년이 지난 후 시댁에서 마련해 준 극동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어. 20평짜리 아파트였지. 처음엔 좁게 느껴졌지만, 거기서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독립해서 살게 됐어. 그 때가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시작이었지.
그 당시 아파트 가격은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저렴했어. 우리 가족은 20평짜리 극동 아파트에서 8개월 정도 살다가 우리 친정 아버지가 등촌동에 땅을 싸게 구해서 집을 지어주겠다고 해서, 등촌동에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되었지. 거기서 둘째 무석이를 낳았어. 하지만 어느 날 도둑이 들어오는 바람에 너무 무서워서 거기서 더 살 수가 없었지. 그래서 다시 이사를 갔고, 할아버지가 직장 다니며 버신 돈으로 신사동 설악 아파트를 사고, 그 다음에는 서초동에 52평짜리 진흥 아파트를 사서 이사갔어. 그 때 우리 아이들도 학교 들어갈 나이가 됐고, 우리는 그렇게 집을 계속 옮겨 다니며 살았단다.
그 때 직장인들 월급이 얼마였냐고? 할아버지가 처음에 방림 방적에서 일하셨을 때 7~8만 원 정도 받으셨어. 근데 외국인 회사로 옮겨서 일하시면서는 몇 배 더, 훨씬 많이 받게 되셨지. 70년도 그 당시에는 아파트 값이 그렇게 비싸지 않았어. 강남이라고 해도 400만 원 정도면 충분했던 걸로 기억해. 우리 부모님이 처음에 그렇게 말씀하셨었거든.
신사동 설악 아파트, 서초동 진흥 아파트 이 후에 1980년대에는 오금동 현대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 59평짜리 아파트였고 8,100만 원 정도 했던걸로 기억해. 서초동 집을 팔고 나서 돈도 좀 남았던 기억이 나네.
이사를 많이 다녔지만, 부동산 투기는 아니었어. 나는 그냥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을 넓혀가는 거였지. 우리 부모님도 빚지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고, 나도 남한테 손 벌리는 걸 싫어했으니까 남편이 번 돈을 모아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조금씩 넓혀간 거야.
그 때는 아이 둘 낳는 게 일반적이었어. 아들이든 딸이든 둘만 낳고, 더 많이 낳는 건 국가에서 권장하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운 좋게도 개나리 아파트 30평짜리를 받을 수 있었어. 왜냐하면, 그 때 정부에서는 애 둘 낳고 불임 수술을 하는 조건을 충족하면 아파트를 줬어. 나는 제왕절개로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불임 수술도 함께 했지. 그 덕분에 개나리 아파트 당첨됐었어.
나중에는 그 아파트를 팔기도 했고, 그래서 조금씩 부동산에 대해 알아가면서 오피스텔도 사고 그랬어. 그렇지만 투기는 아니었어. 그런 걸 통해서 조금씩 가족을 위해 좀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하려고 했어. 남편은 돈을 벌고, 나는 아내로서 그 돈을 가지고 우리 가족이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꾸려나가는 역할을 했지. 그냥, 우리 가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야.
아이들의 출산
아이들을 낳고 길렀던 기억,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야. 무연이를 처음 낳았을 때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단다. 임신 중독증에 걸려서, 병원에서도 큰 위기를 겪었어. 그 큰 대학병원에 있지 않았으면 무연이는 이 세상에 오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 위험했던 상황에서 의사 선생님이 급하게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무연이를 구해냈지. 그 후로 무연이를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했고, 나도 많이 약해져서 한동안 무연이를 볼 수도 없었어.
무연이는 정말 강인한 아이야. 그렇게 어렵게 태어나서 여러모로 고생도 많이 했고, 태어날 때 얼굴에 혈관종이 생겨서 성형외과에서 수술도 해야 했어. 그것 때문에 초등학교 갈 때는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할까 봐 걱정도 많이 했었지. 그래도 무연이는 공부를 잘해서 항상 전교 1등을 했고 언제나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고, 학교에서도 늘 앞장서서 활동했단다. 그 시절엔 우리 신앙도 더 깊어졌어. 아팠던 무연이 때문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몰라.
첫 딸 무연이를 낳고,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주변의 기대를 들었고, 내 마음은 다음에도 딸이면 하나 더 낳고 싶다는 생각이었어. 그리고 둘째를 낳을 때, 만약 아들이면 불임 수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어. 순천향대 병원에서 제왕절개 수술 직전에 의사 선생님께서 "아들이에요"라고 하시더니 그 순간 마취가 들어갔어. 그리고 정말 아들, 무석이를 낳았어. 의사 선생님이 수술 중에 나와서 보호자인 남편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대, "아들이니 불임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랑 약속했던 대로 하겠다고 답했대. 그 때가 그랬어, "둘만 낳아서 잘 키우자"는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으니까. 고생 안하고 건강하게 태어난 우리의 둘째 아들 무석이는 아무 걱정없이 정말 순하고 사랑스러웠어.
진짜로, 무연이와 무석이는 우리 가족에게 큰 축복이었어. 그 아이들이 있어서 우리 가족은 더욱 단단해졌고 많은 행복을 느꼈단다.
자식을 키우며
딸과 아들을 모두 낳으니 정말 좋았어. 딸은 집안을 도와주는 살림 밑천 같고, 아들은 든든하고 후계를 이어가는 느낌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 둘 다 갖게 되어서 나는 참 행복했어. 옛날에는 딸과 아들 둘 다 낳는 것을 최고로 여겼거든. 그래서 나는 정말 잘 됐다고, 딸도 있고 아들도 있어서 너무 행복다고 생각했단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연이와 무석이는 학원에 참 많이 다녔어. 그 당시에는 공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예능이나 체육 같은 활동에 할애했던 것 같아. 미술, 태권도, 피아노 같은 거 말이야. 방학에는 스키랑 수영도 배웠지. 캠프 같은 것도 많이 가고, 걸스카웃 같은 봉사단체 활동도 많이 했지. 그 때는 아이들이 공부도 했지만 노래, 미술, 운동 이런 걸 배우는 게 일반적이었어.
나는 어렸을 때 체육과 노래를 못 했어서 운동 잘하는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을 되게 좋아했어. 그런데 딸인 무연이가 노래를 잘하는 게 무척 신기했어. 참 희한하다 했는데 알고보니 너희 할아버지가 노래를 좀 부르시더라고. 내가 못하는 걸 아이들이 잘하니까 더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쳤나 봐.
아이들을 키울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 집에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정성을 쏟았지. 하지만, 너무 귀하게만 키워서 그런지 아이들이 부모 생각을 충분히 못 하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할 때가 있어. 너희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 더욱 외롭고 힘든데, 자녀들은 그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아이들을 너무 위해서만 키웠나 싶어. 어려운 환경을 경험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오히려 아이들이 세상을 잘 모르게 만든 것 같아. 옛날엔 우리 집이 아주 잘 살았고 최고의 것들만 아이들에게 주려고 했어. 그래서 조금 그렇게 자랐나 싶어.
하지만, 무연이와 무석이는 학교에서 항상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로 칭찬을 받았어. 그 점에서는 내가 잘 교육한 것 같아.
어쨌든, 내 자식들은 항상 착한 아이들이야. 선하게 살라고 가르쳤으니까. 선생님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만큼은 분명히 잘 키운 것 같아.
손주들을 보면서
손주들을 보면서, 내 자식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는지 보게 되는구나. 내가 그랬듯이 손주들도 똑같이 키우는 것 같아. 재현이가 밥을 잘 안 먹고 몸이 약할 때, 너희 엄마가 얼마나 애쓰는지 보면서 그 모습이 내가 키우던 모습과 닮았다는 걸 느껴.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는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하니까 그걸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의사가 된다고 하는 재현이에 대해서도 내 마음은 이런 생각이야. 나는 우리 손자가 돈 벌기에 치중하지 말고 사람을 진정으로 치유하는 의사가 되길 바라. 병원을 많이 다니면서 느꼈어. 의사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사람을 치료하고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는 의사, 그런 의사가 진정으로 중요한 거야.
무연이는 의대에 갈 수 있었지만, 너무 힘든 직업이라는 걸 알기에 내가 말렸어. 너무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 나는 딸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어. 요즘처럼 의사가 되면 돈을 잘 번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됐다고 생각해. 정말 중요한 건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그 일에서 오는 마음의 만족이야.
재현이에게도 언제나 말해. 훌륭한 의사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환자를 따뜻하게 대하고, 그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의사가 되길 바라. 돈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할머니는 그런 거에 대해 욕심이 많지 않아. 손주들도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
가족과 함께 보낸 소중한 시간
옛날을 생각하면 우리 가족이랑 친구들이랑 얼마나 즐겁게 지냈는지 몰라. 너희 할아버지가 외국계 회사 ICI에 다니게 되면서, 우리에게는 주말마다 시간이 좀 더 생겼어. 그 회사가 주 5일만 근무하도록 해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토요일마다 무언가를 계획할 수 있었지.
친구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친구네 큰 수영장이 있는 별장에 가서 수영도 하고 그랬어. 남편이 휴가도 많았기 때문에 해외여행도 종종 갔었지. 그때는 정말 재미있게 잘 보냈어.
하지만 무연이, 무석이가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여행을 자주 가지 못했어. 그래도 그때의 추억은 정말 소중해. 우리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야.
손주들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
손자, 손녀들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어.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건,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야. 너희 할아버지가 일찍 암에 걸려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알지? 그래서 말인데, 항상 건강에 신경 쓰고 너무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삶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해.
너희가 건강하고 성실하게 자라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아 그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가족이랑은 언제나 화목하게 지내고, 우리가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해서 너희도 나중에 자식들을 최선을 다해 키우고, 부모님과 어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해. 그렇게 효심 있는 아이들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할아버지의 자식 사랑
너희 할아버지는 정말 자식을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셨어. 자기보다는 항상 아이들이 우선이었지. 결혼해서 우리 가족이 생기고 나서는 나보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셨던 것 같아. 무연이, 무석이가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졸업식 날 상장을 받을 때면 증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서 자랑스러워 하셨던 기억이 나. 그 시절에는 졸업식 같은 날이 정말 큰 날이었으니까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기뻐하고 식사도 같이 하고 그랬었단다.
아들 이야기
우리 무석이 얘기도 좀 해보자면, 중학교 때까지는 항상 전교 등수에 들면서 그 당시 유명했던 대원외고에 갔었지. 근데 그 곳에서는 모두가 전교 등수 들던 아이들만 모였기 때문에 우리 무석이가 조금 힘들어 했던 거야. 무석이가 그 학교에서 높지 않은 성적 때문에 마음이 좀 무거웠던 것 같아.
근데, 그래도 외대 중문어과 졸업 이후에 대기업인 SK텔레콤에 바로 합격하고 모든 게 잘 풀리기 시작했어. 대원외고 동창 친구들과의 좋은 교류도 있었고, 나중에는 회사에서 미국으로 MBA 공부도 보내줬어. 그 때 처음엔 좀 속상했지만, 나중에는 그래도 아들을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로서 뿌듯했어. 결국 무석이가 좋은 친구들 많이 만나고, 좋은 기회도 많이 얻게 되어서 정말 잘 됐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딸과 아들의 결혼
무연이 결혼할 때는 나도 54세로 젊었고, 생각보다 일찍 시집을 보낸다는 느낌이었어. 내가 26살에 그 아이를 낳고 나중에 딸이 27살에 시집 가는 걸 보니까,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더라고. 무연이 신랑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 신앙심도 깊고, 가정도 따뜻하고 우리 딸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지. 부자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런 건 바라지 않았어. 우리 딸이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무석이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를 만나 교제하고 결혼하게 되었는데, 며느리가 너무 곱고 예뻐서 결혼식 날 모두가 칭찬하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지. 그 때 애들 아빠가 몸이 많이 편찮으실 때라 좀 더 서둘러서 결혼했던 기억이 나. 나는 다른 집들처럼 큰 예단이니 뭐니 바라지 않았고, 그저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어. 내 아들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그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할아버지의 암 투병생활
아이들 다 결혼시키고 나서도 고민거리가 있었지. 특히, 애들 아빠가 43세라는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려서, 그 병과의 기나긴 싸움이 우리 가족에게는 큰 시련이었지. 그래도 그 사람이 병으로 고생할 때마다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지지와 사랑을 보내주었는지 몰라.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친척들까지 모두가 우리 가족을 도와주셨어.
애들 아빠는 항상 가족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나한테도 정말 잘해줬어. 해외에 있을 때도 나한테 꽃을 보내고, 생일 때마다 특별한 선물을 해줬지. 그렇게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어. 암 때문에 8번이나 수술을 받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가족들 덕분에 힘든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어.
특히, 너희 증조 할아버지는 정말 든든한 지원군이셨어. 아버님은 생각이 깊고, 큰 아들을 많이 좋아하셨지. 큰 아들인 애들 아빠도 그런 할아버지를 닮아서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어. 그렇게 가족 모두가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위안을 받았단다.
맏며느리 생활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지만, 그렇게 힘든 건 아니었어. 처음에 시댁에서 잠깐 같이 살 때는 2층이라 좀 춥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일이 많았거든. 집이 넓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았고, 특히 너희 증조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너무 귀여워하셨어. 할아버지가 무연이랑 무석이 뺨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놀아주시는 모습이 정말 즐거워 보이셨지. 물론 나도 나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어. 하지만 큰 어려움이라 할 것은 없었던 것 같아.
분가 후에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고 세배 같은 행사를 치렀어. 큰 아들 중심으로 가족이 모여 사는 그런 따뜻한 분위기였지. 무연이랑 무석이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행복했단다.
손주들과의 첫 만남
손주들을 처음 보게 됐을 때의 기분이 어땠냐고? 그게 참 특별한 순간이었지. 처음에는 무연이가 바쁜 직장 생활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 줄 알았어. 그러다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 그런데 5년 후에 귀한 아들 재현이가 태어났어. 할아버지는 두 돌이 될 무렵에 돌아가셨지만, 재현이는 그래도 많이 보셨어. 손주는 어떻게든 다 귀하고 예쁜 법이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그리고 우리 채범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일 만에 세상에 태어났어. 그래서인지 나는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뭔가 특별한 느낌을 받았어. 채범이를 볼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뭔가 성품이나 태도에서 할아버지를 닮은 듯한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예서는 막내로 태어난 하나뿐인 손녀 딸이라 너무 예쁘고 귀여웠어. 여자아이라 그런지 손자들이랑은 또 다른 매력이 있지.
재현이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항상 1등인게 기특하고, 채범이도 이제 경기외고에 합격해서 정치 외교 동아리에도 들어가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무석이는 채범이가 장차 훌륭한 변호사가 되면 좋을 것 같대. 너희 할아버지도 뛰어난 학생들만 모인다는 경기 중고등학교 때부터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똑똑하셨어. 그래서 채범이도 잘 될 거라고 생각해. 재현이는 말을 많이 안 하지만 채범이는 말재주가 있어서 또 다른 방면으로 능력이 뛰어나다 생각해. 아이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잘 성장하고 있어서 기분이 정말 좋아.
손주들은 누굴 닮았나?
손주들을 보면서 나 자신이나 우리 가족들에서 어떤 모습이나 성향을 닮았는지 자주 생각해. 재현이는 특히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느꼈어. 엄마처럼 어렸을 때 밥 안먹고 똑똑해서 전교 1등하고 그러는게 너무 똑 닮았어. 그리고 채범이는 또 어떻게 보면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외모도 그렇고 착한 성품이나 그런 면에서 말이야. 그리고 예서는 내가 어렸을 때를 많이 닮은 것 같아. 말수가 적고 조금 새침데기 같은데 춤을 좋아하고 잘 췄었거든.
손주들 하나하나가 다 저마다 특별하고,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존재가 없어. 재현이든, 채범이든, 예서든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잘 자라고 있고, 그 모습을 보는 게 나한테는 큰 기쁨이야.
할아버지가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손주들 재롱도 보시고 너희들에게 더 큰 힘이 되었을 텐데..속으로 자주 그런 생각을 해. 할아버지는 정말 대인관계가 좋았어. 친구도 많고 모두에게 친절하셨지.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은 할아버지가 아직도 우리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할아버지의 친구분들은 아직까지도 함께 모이고 그래. 나도 할아버지의 친구 부인들과 종종 모여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있단다.
나의 요즘 일상
할아버지가 안 계시긴 하지만 할머니는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란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외로움을 덜 느끼려고 노력해. 라인댄스도 하고, 기체조도 하고, 아침마다 산책도 하고, 노래 교실도 다녀. 그래도 아주 가끔은 큰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긴 해. 하지만 내가 워낙 이런 활동을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보다는 외로움을 덜 느끼며 지내고 있단다.
자식들하고 같이 살 생각은 별로 안 했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없었고, 아이들도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도 다 같이 모여서 식사라도 자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 요즘 손자들 공부 때문에 예전보다 모임도 자주 못 갖게 되더라고.
무연이와 이야기했을 때, 옛날처럼 많이 놀러 다녔던 시간들이 많이 그리워 지더라고. 우리도 이제 손주들이 다 커서 결혼도 하고나면 가까이 살면서 또 자주 만날 수 있겠지.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는 나한테 꽤 마음에 들어. 여긴 실버타운 같이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서 편안하고, 물이 흐르고 산도 보이는 조용한 곳이야. 그래도 집이 크니까 관리하기가 좀 힘들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어.
요즘 하루 일과 중에 가장 즐거운 일은 딱히 없어. 몸이 예전처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한거야.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 보면서, 나는 그저 건강하게 지내다가 평안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돼.
아픈 곳과 건강관리
요즘 건강은 어깨가 좀 불편해. 어깨 힘줄이 다 끊어져서 관절을 갈아야 한다고 해서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권유했었어. 그런데 그 수술이 만병의 해결책은 아니라고 들었어. 부작용도 있고, 재활도 6개월이나 걸린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고민 끝에, 많은 운동을 하면서 내 방식으로 치료를 시도했어. 놀랍게도 그 덕분에 아픔이 줄어들고 괜찮아졌어. 운동을 통해 근육이 좀 생겨서 그렇다고 하더라. 관절 대신 근육이 활동을 돕고 있나 봐. 그래서 요즘은 팔을 예전보다 훨씬 잘 움직이고 있어. 밤에도 예전처럼 아프지 않고 식사할 때도 불편함이 많이 줄었어. 수술하지 않고도 이렇게 회복되니까 정말 다행이야. 병은 열심히 운동하면서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
어느 날, 너희들 모두 미국에 있을 때였어. 갑자기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엉금엉금 기어서 핸드폰을 찾아서 119에 전화를 했단다. 그렇게 해서 구급차에 실려 갔고, 갑자기 허리 수술을 해야 했어. 마비가 왔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또 한 번은, 운동하러 가다가 차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사고가 났어. 그 사고로 다리 한쪽 관절이 완전히 나갔었지. 그런데 그 때도 너무나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고 잘 나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내 몸을 들여다보면 수술자국이 네 군데나 있더라고. 제왕절개를 해서 배에 두 번, 디스크 때문에 목에 수술자국, 그리고 허리에도 수술자국이 있어. 그렇게 많은 수술을 겪었지만, 암 같은 큰 병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맨날 끝나고 나면 '다행이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더라고. 이렇게 너희랑 함께 이야기하면서 과거를 돌아보니, 사는 동안 그런 고비도 많았는데 그래도 다 잘 넘길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하네.
내 건강 비결이라면, 아마도 자연 속에서의 산책이야.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데서 편안하게 걷는 것 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아. 골프도 하고 수영도 해봤지만, 잘 안되면 스트레스도 받고 무리하면 다치기도 하고 다 좋은 건 아니더라. 스트레스 받지 않고 편안하게 자연을 느끼며 걷는 걸 가장 좋아해.
그리고 요즘엔 라인댄스를 시작했는데, 춤을 출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나름 춤 실력도 있나 봐, 남들보다 좀 더 잘 추는 것 같아. 몸매 이쁘다는 소리도 가끔 듣고 춤추는 걸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 있어. 스텝을 재미있게 잘 따라갈 때마다, '아, 나 춤추는 거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더라고.
음식으로도 건강 관리를 해. 당뇨가 걱정이 돼서 돼지감자 같은 걸로 차를 만들어 마시고, 필수 아미노산이 들은 단백질 식품도 많이 신경 써서 먹어. 아침마다 계란이나 우유 같은 단백질 식품을 꼭 먹고 과일도 많이 먹으려고 해. 세 끼를 거의 정해진 시간에 꼭 먹는 편이야.
원래는 육식을 좋아했는데, 친정 식구들의 당뇨, 고혈압 병력을 보면서 야채나 식물성 식품을 더 많이 먹으려고 노력해. 나물 같은 것도 만들어 먹고, 콩 식품도 조금씩 먹으려고 노력해. 억지로라도 몸에 좋은 걸 먹으려고 하는 편이지.
가족의 유대와 전통
요즘은 세대 간에 갈등이 있다고들 하잖아. 나이 드신 분들하고 젊은 분들 사이에 대화도 잘 안 통하고,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 그래도 나는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어. 인터넷 쇼핑이나 새로운 문화에 대해선 웬만하면 배워서 따라가려고 해. 그런데 문화가 계속 발전하니까 새로운 것이 많이 나오더라고. 나이 들면서 손가락이 오타를 내거나, 이전보다 조금씩 못 따라가는 게 느껴져. 그리고 옛날 문화와 많이 다르고, 각자가 바빠서 좀 이기적으로 변한 면도 있어. 옛날에는 가족이나 친척들과 자주 모이고 더 푸근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명절 때나 되야 다 같이 모이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옛날 같이 가족이나 친척들과 어울려 즐기던 시간들이 그리워지기도 해.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도 가족이나 친척들과 자주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은 옛날처럼 대가족이 모여서 산소 가는 것도 드물어졌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우리 가족이 크게 모였을 때야. 증조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시부모님이 우리 애들까지 다 데리고 갔던 것. 그 때는 작은 집 사람들까지 오니까 한 20명은 됐어. 각자 뭔가를 조금씩 가져갔지. 그 중에서도 내가 큰며느리로서 과일이나 중요한 거는 제일 잘 고른 걸 가져갔어.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손이 큰 며느리 덕분에 좀 더 위신이 서신 것 같아. 나는 그런 것에는 손색이 없었어. 생각보다 힘든 일은 피했지만, 돈으로라도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왕이면 조상님께 드리는 건 좋은 걸로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좋아하는 노래, 가수, 계절
좋아했던 책이나 노래가 있냐고? 어릴 땐 책도 많이 읽었지만, 커가면서 음악에 더 빠져들었단다. 특히 팝송을 좋아했어. 친구들과 포터블 전축을 들고 해변가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팝송을 듣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그 때 좋아했던 가수는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었지. 우리 젊은 시절에는 팝송이 큰 인기였어. 그리고 팝송 뿐만 아니라 조영남, 송창식 같은 가수들 노래도 많이 들었어. 맥주 마시러 라이브 까페에 갔다가 송창식이랑 트윈폴리오가 앞에서 직접 노래부르는 걸 들어본 적도 있단다.
그리고 난 '사랑해 당신을' 이라는 노래를 특히 좋아했었지. 너희 할아버지가 나랑 같이 부르자고 할 때마다 꼭 그 노래를 불렀단다. 그래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나. 아마도 그 노래가 우리 사랑의 노래였나봐.
손자, 손녀들아,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말해줄게. 여름은 정말 싫어해. 너무 더워서 못 견디겠거든. 할머니는 더운 건 질색이야. 그래서 아무래도 공기도 선선하고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이 좋아. 나이가 드니까 가을 단풍을 생각하면 한 번은 화려하게 피어나서 전성기를 보내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시들어가는 게 꼭 우리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억에 남는 선물, 젊은 시절 취미
손자, 손녀들아, 할머니가 받았던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어. 너희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정말 감성적인 선물을 줬거든. 편지 끝에 예쁜 꽃을 말려서 붙여 보내주거나, 동그랗고 특별하게 만들어진 나무 핸드백 같은 선물을 준 적이 있어. 그런 선물들이 할머니한테는 정말 의미 있고 사랑이 느껴졌어. 그리고 졸업식 때는 노란 프리지아 꽃을 받았는데, 그 꽃말이 참 좋더라고. 영원한 사랑 같은 의미였어. 꽃 선물을 받을 때면 여자들은 마음이 굉장히 따뜻해 진다니까. 그런 선물들이 나는 보석보다 더 감동적이었단다. 할아버지는 말은 별로 안 하셨지만, 그런 감성적인 면이 있으셨어.
할머니가 어릴 때 좋아했던 취미도 이야기해줄게.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했어. 특히 동양화를 배우면서 상도 받고 작품도 만들었단다. 대원군의 사군자처럼 멋진 그림들을 그렸었지. 할머니 집에도 그런 그림이 있었어. 그리고 약간 크면서는 멋부리는 것도 좋아했어. 젊었을 땐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헤어스타일도 셀프로 해보고, 멋을 내는 거에 소질이 있었단다. 옷도 예쁘게 잘 입고 다녔어. 할머니가 된 지금도 유행을 잘 따라가려고 하는 편이야. 예전처럼 비싼 옷은 못 사도 여전히 멋을 내려고 노력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손자, 손녀들아, 할머니 인생에서 정말 기뻤던 순간 몇 가지를 이야기해 줄게. 제일 먼저, 무연이가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 정말 뿌듯했어. 그리고 무석이가 태어났을 때도 너무 행복했단다. 무석이는 어릴 때부터 하얗고 통통하며 우유를 정말 잘 먹었어. 또 하나, 여행을 갔을 때도 정말 즐거웠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2년 전에 터키를 함께 갔었는데, 그 때 정말 인상 깊었고, 무연이랑 동유럽 여행 갔을 때도 너무 좋았단다. 특히 크로아티아가 아름다워서 기억에 남아. 여행할 때마다 세상을 넓게 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런 순간들이 정말 행복해.
존경과 자부심
손자, 손녀들아, 또 할머니가 이야기할 건, 할머니가 살면서 마음에 담고 사는 분들과 특별한 순간들에 대해서야. 할머니가 직장 생활할 때, 한 선배가 있었는데, 그 분은 할머니보다 나이가 좀 있었어. 사람들이 이런저런 소리를 할 수도 있는 나이였지만, 그 선배는 자기 일을 너무 열심히 하고 항상 긍정적이셨어. 바로 그 모습이 참 멋있었지. 그 분이 일하시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단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위치에 올랐는지 말해주고 싶어. 88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멋지게 세계에 자신을 보여줬는지 기억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뿌듯해. 할머니 젊은 시절 미국에 여행 갔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보였는지 기억해. 그 때는 주위에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좀 남루해 보이고 그래서 창피했던 기억이 나.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나라는 많이 발전했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야. 손자, 손녀들은 정말 좋은 시대에 태어났어. 우리나라가 이렇게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 수 있게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는 걸 잊지 말고, 너희도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줘.
여행에 관하여
손자, 손녀들아, 할머니가 이제까지 많은 나라들을 여행 해봤단다. 아프리카랑 남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 가본 것 같아. 이제 비행기를 오래 타는 건 조금 힘들어져서, 예전처럼 긴 여행은 쉬울 것 같지 않아.
하지만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예를 들어, 알래스카를 크루즈로 한 번 가보고 싶단다. 빙하를 보는 건 정말 멋질 것 같아. 또 스페인 남부나 프랑스 남부 그런데도 너무 좋지. 그런데 이제는 체력이 안되서 그런 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걱정 마렴. 할머니는 아직도 친구들과 함께 국내 여행을 많이 다니고 있어. 이번에는 남해안 쪽으로 가 볼 계획이야. 매 계절마다 좋은 곳 많이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그게 바로 할머니의 즐거움이야.
요즘 나에게 중요한 일
손자, 손녀들아, 할머니가 해보고 싶은 일을 묻는다면, 사실 이 나이에 와서는 건강이 최우선이란다. 친구들하고 만나면 서로의 건강을 빌어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와. 요즘엔 주변에서 치매니 뭐니 아픈 얘기를 많이 들으니, 나도 그런 건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아서 머리, 두뇌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단다.
이름이나 다른 것들을 잘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책은 눈이 좀 침침해져서 읽기 힘들 때는 녹음된 것들로 듣곤 해. 성경도 그렇게 듣고 있어. 어쨌든 지금은 건강을 지키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강하게 살아야 여행도 가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부모가 아프지 않게 스스로를 잘 관리해서 자식들한테 부담을 주지 않는 거야. 본인이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란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자식과 손주들에게 할머니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물어보면, 아마도 너희는 할머니가 항상 호강하고 편안하게만 살았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았어. 모든 사람의 삶에는 힘들고 외로운 순간들이 있거든. 할머니도 혼자서 해결해야 했던 일들이 많았단다.
너희 할아버지가 오래 편찮으신 동안 할머니는 정말 많이 힘들었어. 병원 수술실 문 앞에서 혼자 기다리던 시간들, 그 무거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니? 그래도 자식들한테는 그 어려움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 그 땐 애들이 어리고 학생이라 공부해야 했으니까.
그런 어려운 순간들 속에서도 할머니는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랐어. 그리고 그런 사랑과 희생이 결국은 너희들에게 전달되었길 바라. 할머니는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그저 유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될 지 모르겠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을 위해 많이 애쓰고 힘들어했던 순간들도 많았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손자, 손녀들에게 말이야, 할머니는 죽음을 그리 무섭게 생각하지 않아. 이제 살만큼 살았고, 할머니네 가족들 대부분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는 현재까지도 꽤 긴 세월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할머니의 바람은 그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해. 그리고 가능하다면, 좋은 일을 하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할머니는 친구들에게는 명랑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으로,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에게는 힘들고 외로웠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항상 너희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지켜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지금도 할머니는 건강하게 너희들과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싶어. 할머니의 삶이 너희에게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길 바라.
나의 이야기를 마치며
이 인터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서, 먼저 우리 가족에게 주고 싶어. 그 다음은 친한 친구들이나 주변 친척들에게도 몇 권 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산 이야기들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거야.
솔직히 이런 기록이 손자, 손녀들에게도 중요할 거라고 생각해. 아마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커서 우리 가족의 이야기들을 알고 싶어할 날이 올 거야. 그럴 때 이 책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겠지. 내가 이야기한 것들이 손자, 손녀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길 바라. 부모가 조금씩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자신들의 뿌리를 아는 건 어릴 때부터 중요하니까.
이런 인터뷰를 하면서 나도 나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어. 즐거웠던 추억들도, 슬프고 힘들었던 순간들도 모두 나의 인생이니까. 이 책을 통해서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 나중에는 손자, 손녀, 후손들까지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되면 좋겠어.